청룡6중대장님(1970)편지 (20대사령관

왕오천축국전을 왜 프랑서가 보관하고 있는지

dogmc 2012. 11. 9. 20:23

 

 

왕오천축국전을 왜 프랑스가 보관하고 있는가

임 종 린



혜초가 1200년 전 인도와 중앙아시아 험난한 지역을

여행하다가 고향을 그리며 읊은 시는 가슴 뭉클하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감동이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뜬구름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구름에 실어 편지라도 부치려는데

바람이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비행기와 열차 자동차가 걷는 수고를 덜어주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혜초가 경험했던 당시의 여행은 고행 길 이였다

7~8년 오랜 세월을 제 발로 걸으며 목숨 걸고

거친 자연과 낯선 사람들과 싸워야 했던 스님

고난의 길이였기에 고향 땅과 고향사람들을

그리는 정은 마음에 사무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왕오천축국전은 1900년에 중국 돈황(敦煌)동굴에서

프랑스인 펠리오(Pelliot)에 의해 처음 발견 되었다

앞뒤가 떨어져나간 227행이 동굴 속에 남아있었고

높이 28.5센티미터, 길이 358.6센티미터의 두루 말이

온전치 못한 것이 아쉽지만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풍물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으로 커다란 가치가 있다

숨어있는 비밀은 많지만 두 가지를 우선 알아야 하는데

왕오천축국전이 왜 훼손된 채 돈황 동굴 속에 남아있었고

혜초는 왜 신라로 가지고 돌아가지 않았는지 궁금해 진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병인양호 시 강화도에서 약탈당한

서적류와 같이 보관돼 있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는 돌려줄 수 없다고 하며 찾아 갈려면 다른 유물과

교환 제안을 한 적이 있어 협의는 고착상태에 있다고 한다



혜초가 활동했을 당시 중국에 유학한 신라 구도승은 18명

그 중 인도에 갔던 스님은 15명이며 목숨 잃은 스님은 10명

중국이나 신라에 살아서 돌아온 스님은 고작 5명뿐 이였다

이처럼 목숨을 내건 험난한 여정 이였지만 진리를 찾겠다는

뜨거운 열정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강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역경 이겨낸 불심 충만한 승려이자 선진학자임이 틀림 없다



우리는 문화민족으로 자리잡아 세계10대 경제성장국이 되었다

이 눈물겨운 고행으로 얻어진 인도기행수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약탈자들로부터 찾아내는 지혜와 용기를 한곳에 결집할 때이다



*1200년 전 숨겨진 비밀을 찾아 인도에서( 2007.4.7 )